대법원이 지난 2013년 12월 전원합의체에서 통상임금 관련 판단 기준과 법리를 제시한 지 2년이 넘게 흘렀지만 산업 현장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이어진 여러 건의 대규모 소송에서 일선 재판부의 판결이 개별 사안에 따라 엇갈리면서다.
국내 단일 최대사업장인 현대차는 지난해 말 가까스로 임금 및 단체협상을 타결지었으나 상여금의 통상임금 산입 여부에 대한 결론은 여태 내지 못한 상태다. 산업 현장에선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소급 청구를 제한하는 요건인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거나 국회 입법 작업을 통해 소모적인 노사 갈등을 갈무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 이후 이어진 여러 소송에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건 통상임금 기준의 하나인 '고정성(근로자가 업적·성과 등 특별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사전에 확정돼 고정 지급할 것)'과 '신의칙' 적용 여부다.
◇대법원 통상임금 법리제시 2년 넘게 흘렀지만= 13일 부산고등법원이 1심을 뒤집고 사실상 원고(노조) 패소 판결한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항소심의 쟁점도 '고정성'과 '신의칙' 원칙이었다. 재판부는 1심과 달리 명절상여금(100%)은 재직 요건이 있는 근로자에게만 지급했으므로 통상임금 기준(정기성·일률성·고정성) 중 고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정의에 부합하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이 지난해 8월 국민은행 퇴직자와 재직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일부 패소 판결을 내린 것과도 같은 취지다.
재판부는 또 원고가 청구한 통상임금 3년치 소급분 지급 청구도 조선업황 침체로 인한 대규모 부실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현대중공업의 사정을 감안해 기각했다.
문제는 상여금의 고정성과 신의칙에 대해 이와 정반대의 판단이 내려진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부산지법은 지난 2014년 10월 르노삼성 통상임금 소송에서 재직자에게 일할 계산으로 지급한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이라고 판시했다.
서울북부지법 역시 지난 해 1월과 7월 각각 삼양교통과 서울시 버스운송사업조합 사건에서 재직자에게만 주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고정성에 대해 대법원의 판단 취지와 다른 판결이 내려지다 보니 소송이 남발되고 노사관계가 악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법원마다 '신의칙' 적용 기준 달라 혼선= 대법원이 통상임금 확대 적용으로 인한 기업의 경영부담을 줄이기 위해 제시한 '신의칙'도 법원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기업의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해서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8월 아시아나항공 근로자 27명이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면 노사가 상호 합의한 통상임금액 및 임금인상률을 훨씬 초과한다"며 신의칙 적용을 인정했다.
신의칙을 부정한 1심(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1심 재판부의 경우 아시아나가 2010년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갔으나 2012년까지 순이익을 냈다며 신의칙을 부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아시아나가 10년간 1조원이 넘는 누적 손실을 기록했다며 반대로 판단했다. 1, 2심이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의 판단 지표를 달리 적용한 셈이다.
재계에선 법원이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기업의 재무적 리스크를 예상하고 신의칙 여부를 판단하는 건 불합리하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통상임금 확대로 애초 합의한 임금 수준을 초과하는 재정적 지출이 예상된다면 신의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게 재계의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대법원이 신의칙을 판단할 수 있는 재무항목 등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정하거나 법으로 통상임금 범위 등을 명확히 해 일선 산업 현장을 혼란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